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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기 NOTES

16/01/22

아버지가 가지고 온 국민의당 창당발기인 종이쪼가리에 사인을 해드렸다. 며칠 전의 일이다. 돈도 없고 빽도 없으면 줄을 잘 서야 한다, 그런 운운에 대해서 동감하지 못하는 바가 아니지만은, 남한 대부분의 가정에서 이런 비슷한 일들이 아주 오랜 동안 일어났으며 일어나리라는 것을 통탄한다. 뜻하지 않은 계기로 오랜만에 peaky blinders를 다시 정주행하게 되었는데, 나는 이 드라마를 예전에 보다가 만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으나 알고 보니 시즌2까지밖에 안 나왔던 것이었고, 예전에 나는 모두 본 것이었다. 검색해보니 시즌3이 이번 1월 중에 영국에서 방영된다고 하니 뭔가 contemporary people이 된 기분이다. 1920년대 갱단을 다루는 영국 드라마인데, 시즌1에서 사회주의자가 작지 않은 비중으로 줄곧 등장한다. 이름은 Freddie Thorne, 거물급 볼셰비키로 파업을 주도하거나 다른 조직원과 접선하는 모습 등으로 그려지는데, 실질적인 이념대립보다는, 그 당시에 만연했던 사회적인 갈등의 일환을 소개하기 위한 도구 정도로 소비되는 것 같다. Peaky Blinders는 부패한 지방 경찰을 매수하여 버밍험 일대를 장악한 갱단이다. 이 버밍험에 제국주의 국가로서의 영연방을 대표하는 Campbell 경감이 발령을 받게 되어 이야기의 발단이 시작되는데, 그 까닭은 Peaky Blinders가 우연히 국가 소유의 대규모 무기를 절취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버밍험의 한 갱단이 사단 규모의 무기를 갖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영연방과 전쟁을 벌이고 있던 아일랜드 공화주의자들, 이에 더해 폭력 혁명을 시도하는 사회주의자들이 얽혀 무기를 놓고 다투게 된다. (시즌1) 시즌2까지 내내 이 드라마는 살인, 방화가 일상인 주인공(공권력에서 보자면 그래봤자 피래미인)이 진창 속을 헤쳐 깨끗한-합법적인 나름대로의 지배자가 되기 위한 악전고투를 보여준다. 굳이 이 드라마 내용을 길게 적은 이유는, 내가 국민의당 창당발기인에 서명한 이유에 대한 변명을 이 만신창이 같은 내러티브-그러나 실화인-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방학이 생각했던 것보다 어영부영 빨리 지나가버려서, 읽고자 한 만큼 책을 읽지는 못할 것 같지만은, 내가 철학 공부를 할 때 가장 기뻤을 때가 김상환 교수님의 저서를 읽을 때였는데, 그것이 과연 현실 인식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하면은, 나는 고작 몇 마디 유려한 문장에 빠졌던 것뿐이지, 그것이 전혀 학문적-내적인 발전으로 이뤄지지 못했고, 그러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고 따라서 그 아름다운 논문들을, 내것으로 만들기보다는, 내가 좋아하던 시 구절 몇 개를 외우는 것처럼 마치, 그래놓고 몇 마디 남들 모르는 것 알고 있다는 아주 참담한 꼴로. 해서 나는 어떤 운동가로서 나 자신을 더 이상 바라볼 수 없겠다라는 것, 나의 편력들을 더 이상 나의 기행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하지 않겠다는 것, 노동당에는 탈당 팩스를 조만간 띄우고 롤은 접고 출품을 마치고 도서관에 살아야겠다는 것, 등을 다짐하며 잠에 들어야겠다. 이것이 또 하나의 보여주기로 끝나지 않도록, 내년 이맘 때쯤이면 나의 거취가 다시 결정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2016년 첫번째 글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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