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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DICAL SCIENCE

요한네스 힐쉬베르거, <서양철학사> 上 메모 - 앗티카의 철학 (2)

B. 소크라테스학파


……소크라테스는 일정한 학파의 교의(도그마)를 남겨주려고 했다기보다, 오히려 철학하는 것 자체를 자극했다는 것이다.


a) 메가라학파 : 엘레아학파가 주장한 근원적인 존재 = 소크라테스의 선 (엘레아주의와 소크라테스주의를 종합)

b) 엘리스-에레트리스 학파

c) 키니코스학파 : "덕만으로 충분했다. 그는 외적인 재산을 극도로 경멸했다." 안티스테네스(감각론자, 유물론자), 디오게네스

d) 키레네학파 : 쾌락주의(특히 신체적인 감각에서 느낄 수 있는 쾌락) "즉 꿰뚫어볼 수 있는 것은, 현재의 감각적인 상태뿐이기 때문이다."


II. 플라톤ㅡ이데아 안에 있는 세계


생애


……404년경 30인 참주의 독재와, 그 뒤 일년 간의 민주주의자들의 통치를 체험하고, 특히 소크라테스에 대한 부당한 판결을 보고 난 뒤에 그는 자기 자신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 때 나는 대단한 현기증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마침내 현재의 모든 국가들의 제도가 좋지 않다고 확신하게 되었다……순수하고 참된 철학의 대표자가 국가의 지배자로 되거나, 혹은 국가의 통치권의 소유자가 신의 섭리에 따라, 참된 철학을 열심히 연구하기로 결심하기까지에는, 인류가 이러한 고민에서 풀려날 수가 없다고 선언한다"


……그의 철학은 진리에로 나아가는 길이기를 원함과 동시에, 개인적인 생활이나 공적인 생활에 있어서 선으로 나아가는 길이 되기를 원했다.


……특히 소피스트들과 변론가들에 대한 그의 투쟁은 바로 이런 것에 그 원인이 있다.


  플라톤은 소년시절에는 시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소크라테스를 알고 나서부터는, 그의 희곡들을 불싸지르고, 그의 전생애를 오직 철학에만, 즉 진리와 가치를 학문적으로 인식하는 것에만 바쳤다고 한다.


  플라톤이 아테나이로 돌아온 뒤에, 아니케리스에게 노예에서 풀어준 돈을 갚아주려 했으나 받으려 하지 않자, 플라톤은 그 돈으로 헤로스 아카데모스의 신전 근처의 한 정원을 사들여, 거기에다 387년 아카데메이아를 세웠다.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는 바로 인간현성과 인간지도에만 전념했으며, 그래서 공공생활을 위한 새로운 자극은 항상 이 아카데메이아에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고대에 있어서는, 철학이 학자들의 서재에만 처박혀 있는 현실생활과는 동떨어진 그런 것이 아니라 항상 적극적으로 현실을 형성해 나가는 그런 것이었다.


  철학은 폭정을 행하는 자들과 독재를 행하는 자들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을 위한 거점이었고 피난처였다.


저작


청년기 : 라케스(용기), 카르케니데스(사려), 에우티프론(경신), 트라시마코스(정의), 프로타고라스 (덕의 본질), 이온, 힙피아스I·II, 변명, 크리톤


과도기 : 리시스(우정), 크라틸로스(언어철학), 에우티데모스(소피스트를 비웃음), 메넥세노스, 메논, 고르기아스


원숙기 : 파이돈(죽음), 심포지온(삶), 국가(정의를 비롯하여 철학 전체), 법률(국가)


  이 시기의 저작들에서는 백발이 성성한 노철학자의 생활경험과 원숙한 지혜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제 플라톤도 훨씬 너그러워졌다. "국가"에서 부인들과 어린이들과 재산을 공유하라고 하던 과격한 요구는 "법률"에서는 빼버리고 말았다. 기타의 모든 플라톤의 대화에서 말을 이끌어가던 소크라테스는, 노년기의 저작들에서는 차츰차츰 물러앉고 만다. "법률"에는 소크라테스가 한 번도 나타나지 않는다. 대화의 형식이 이렇게 바뀌는 것은 플라톤의 사상이 바뀌었다는 증후이기도 하다. 플라톤은 그의 스승을 너무나도 멀리 넘어서 버렸기 때문에 자기의 사상을 스승의 입에 담게 할 수는 없었을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