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있어서, 높이와 깊이가 함께 있는 일도 가끔 있다. 아마 그리스정신은 소피스트들에 의한 낮은 곳, 즉 그들의 피상적인 태도, 경박한 언동, 파괴적인 비판, 상대주의 및 회의주의 등을 지나오는 동안에 뿌리째로 뒤흔들리고 위협을 받으면서, 그 정신 속에 깃들어 있는 힘과 생명을 다하여 소피스트들에게 반발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일종의 세찬 반동이었다. 이 새로운 시기의 중심적인 인물은 소크라테스, 플라톤 및 아리스토텔레스였다. 이들은 그리스철학을 고전적인 절정으로 이끌어 올렸으며, 우리 현대인들의 젖줄이 되는 작품을 만들어냈다. 이들은 부분적으로는 여전히 소피스트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들과 대결을 한다. 그러나 이들이 남긴 말의 여운은 당대의 적대자들을 넘어서서, 무한한 미래에까지 울려 퍼진다. 그것은 영원한 철학인 것이다.
I. 소크라테스와 그 학파-앎과 가치
……그의 사고의 중심이 된 것은 인간이다. 인간이라도, 진리와 가치가 그를 위해서 존재하는 그런 인간이다. 소크라테스는 아무 것도 써서 남긴 것이 없다. 그 대신에 그는 일종의 살아있는 철학을 했다. 그는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는 항상 거듭해서 꼭 같은 것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즉 그는, 사람들이 제 자신을 알고 있는지("너 자신을 알아라"), 진리가 무엇이며 앎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지, 또 인간의 가치를 이미 꿰뚫어보고 파악하고 있는지 등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이럴 때마다 그는 거듭해서, 사람들이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런 것이 그의 음미(시험)해보는 기술이요, 스스로의 주장을 스스로 거부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시키는 기술이다.
이러한 것이, 착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자기를 반성하게 하고, 여태까지 혼란되어 있던 생각들을 분명하게 해주고 새로운 통찰을 낳게 해준다. 이것이 그의 "산파술"이라는 것이다.
……
불행하게도 자기들이 이어받은 궤도만 달리고 있던 사람은, 소크라테스가 자기들을 방해한다고 생각하고, 이 영원한 비판자에 대해 악의를 품게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당장 혁신을 일삼는 자라는 둥, 전복을 꾀하는 자라는 둥 하는 관습적인 욕설을 퍼붓게 되었다. 희극도 그를 끌어내렸다.
……
소크라테스는 가난했다. 그러나 그는, 아무도 쓰러뜨릴 수 없는 그런 인물이었다. 크세노폰은 적과 겨울의 혹독한 추위에 대한 그의 용기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고, 플라톤은 밤새워 술을 마시고도 그가 끄떡없었다고 전해주고 있다.
……
그는 감옥에서 탈출할 수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를 않았다.
……
"친애하는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나는 여러분을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들에게보다 신을 더 따를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숨을 쉬고, 힘이 있는 한, 진리를 추구하고 여러분들에게 경고를 하고 계몽을 하며,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나의 여태까지의 방법대로, 양심적으로 이야기하기를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나의 가장 친한 벗이여, 가장 위대하고 정신적인 도야로 뛰어난 도시의 시민인 너는, 너의 지갑을 가능한 한 많이 채우고, 명성과 존경을 받으려고만 노심초사하고 있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도덕적인 판단, 진리 및 너의 영혼을 개선하는 데는 조금도 관심이 없고, 또 노력도 하지 않느냐?"
그러나 그는 죽지 않을 수 없었다. 소크라테스는 최후까지 친구들과 더불어 영혼의 불멸에 관해 철학하면서, 조용히 그리고 점잖게, <독인삼의 잔>을 마셨다.
……
소크라테스는 사람의 모습을 갖춘 철학 그 자체다. 그는 지성만 가지고 철학했던 것이 아니라, 살과 피를 가지고 철학했었다. 우리들은 그의 본질(존재) 전체 속에서, 진리가 무엇이며, 가치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체험하게 된다. 그의 철학은 실존적인 철학이었다.
a) 앎
즉 우리들이 인식을 할 때에는, 경험한 하나 하나의 구체적인 사례에서 출발하여, 이 개별적인 사례의 독자적인 성질을 연구하는데, 이 때에 우리는 항상 동일한 것에 부딪히게 되며, 또 이 꼭 같은 특성을 띠고 있는 것을 이끌어 낸다. 우리는 이것을 보편개념이라고 한다. 플라톤은 수십 차례에 걸쳐,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방법을 모범으로 보여 주었으며, 또 그렇게 함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이 옳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해서 얻어진 보편적인 형상을 가지고써, 현실과 삶을 생각한다. 여기에 그의 호리세스타이 카토루가 성립된다. 이것은 보편자의 도움을 받아, 개별적인 것들의 윤곽을 그리고 한계짓고 규정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시적인 환상의 직관이나 영원히 흐르고 있는 형상을 구체적으로 채워나감으로써 세계를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냉철하고 툇핵된 도식적인 사상이 갖는 보편적인 유형을 가지고써 세계를 파악한다. 이러한 결과로 우리들의 세계상은 빈약해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 대신에 두 가지의 커다란 이익도 있다. 첫째로, 이러한 인식은 심화된 인식이다……이 보편적인 것은 본질적인 것이며, 덕을 덕이게끔 해주는 바의 것이다.
둘째로, 소크라테스는 자기의 보편개념 안에서 일종의 확실한 앎을 갖게 된다.
즉 보편개념은, 여기서는 이렇게 보이고 저기서는 이렇게 보이는 그런 생각이 아니라, 그것을 생각하는 주체에 좌우되지 않고 항상 꼭 같은 것으로서 나타나는 지식의 내용을 형성한다. 그리고 이런 지식의 내용은 기분이나 입장에 따라 발명되거나 창안된 것이 아니라, 경험할 수 있는 현실 속에서 발견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들의 상대주의와 회의주의를 극복해 낸다.
……
이오니아학파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지식의 재료였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소크라테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우리들이 순수하고 확실한 앎에 도달할 수 있는가 하는, 방법적 논리적인 문제였다. 그는 최초의 진정한 인식이론가였고, 이런 점에서 보자면 근대인의 한 사람이다.
b) 가치
가치의 문제에 있어서는, 앎의 문제에 있어서와 반대가 된다. 여기에서 그에게 중요한 것은 물질적인 측면이다.
그는 내용상으로 보아 선이 무엇인가, 특히 윤리적인 선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고자 한다. 그에게 있어서는 가치의 문제가 곧 윤리의 문제가 된다.
……
그래서 최종적인 대답을 해주는 것은 행복주의밖에 없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바로 이 행복주의와 대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
그래서 그(칼리클레스)도 좋은 쾌락과 나쁜 쾌락을 구별하게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행복주의도 극복된다. 왜냐하면, 이제 욕망(쾌락)과 성향이 간단히 윤리적인 선으로서 인정되지 않고, 쾌락을 넘어서서 좋은 쾌락과 나쁜 쾌락을 구별짓는 새로운 기준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럼 이 새로운 기준이란 무엇인가?
……
계몽주의시대의 윤리학과 교육학은 이런 "소크라테스주의"를 기치로 내걸고, "덕은 앎(지식)이다"를 "앎은 덕이다"로 바꿔 말할 수 있는 동일판단으로 생각하고, 앎과 계몽만으로 사람들을 교육할 수 있다고 믿었다.
지난 19세기의 사람들은 "이성의 지배"와 "이상을 아는 것"이라는 두 가지의 개념을 통해, 소크라테스의 사상에 접근하려 했다. "이성"과 "올바르게 이해된 지식"은 항상 올바른 행위에로 인도한다고 생각되었다.
……사실에 있어서는, 소위 소크라테스의 주지주의는 결코 현대적인 뜻의 주지주의가 아니며, 그리스의 기술(Techne) 사상의 표현형식임에 지나지 않는다.
……
윤리학에 있어서의 소크라테스의 주지주의는 바로 이런 것을 가리킨다. 윤리적인 사실과 기술적인 사실이 나란히 파악된다……그것은 바로 덕은 가르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런 것을 배경으로 삼아 "아무도 자진해서 악을 행하지 않는다"고 하는 소크라테스의 유명한 명제가 그 뜻을 가지게 된다……왜냐하면 만약에 기술에서 어떤 것이 잘못되었다고 한다면, 그 이유는 항상 필요한 지식과 능력이 없어서 그렇게 된 것이겠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식과 능력이 없을 때에는 잘못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용어의 억압 때문에 소크라테스의 윤리학은 공리주의로 전락하게 되고, 특히 크세노폰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복리의 도덕과 비슷해져 버리고 만다.
……만약에 우리들이 이 안녕과 복리의 도덕을 관습대로, 행복주의라고 일컬으려 한다면, 그렇게 해도 상관없다. 단, 동시에 행복주의는 안녕과 복리의 도덕이라고 선언할 때에만 그렇다. 왜냐하면, 행복 개념은 원래 여러 가지 뜻을 지니고 있고 모든 가능한 윤리적인 원리들 중의 한 가지이기 때문이다.
스토아학파의 윤리도 그들의 원리가 행·불행과 아무런 상관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행복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행복주의라기보다 쾌락주의라고 하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왜냐하면, 공리주의와 복리주의 도덕에서 행복이라고 보여지는 것은, 칸트가 이미 바르게 지적했던 것처럼, 우리들의 욕구능력에, 즉 최고의 선에 관해서 말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역시 욕망과 성향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가 욕망과 성향을 윤리적인 원리로서 거부했다고 하더라도, 또 행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덕이지 외적인 재산이 아니라는 현자의 자족을 가르쳤다 하더라도, 소크라테스가 공리주의자, 행복주의자, 특히 때로는 쾌락주의자로 보여지는 데는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만 그의 윤리학의 근본개념이 기술적인 사고의 분야와 자기의 개념세계에 뿌리박고 있는 결과이다……이렇게 해서 소크라테스에게 있어서는, 한편으로는 그의 인격과 의지 사이에 모순이 드러나고, 다른 편으로는 그의 인격과 윤리적인 개념의 세계 사이에 모순이 드러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것이 바로, 그의 위대한 제자 플라톤을 끈질기게 자극했다. 기술, 목적달성에 쓰임새가 있는 것, 성향 및 쾌락 등의 개념은 스승의 생활과 의중에 있던 이상주의를 드러내는 데 알맞은 것이었을까? 모든 것들을 올바르게 파악할 수 있기 위해서는 새로운 언어, 새로운 이념(관념)의 세계가 개척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정말로 여기에서 부족함(결함)이 제거되어야만 한다.
만약에 우리들이 소크라테스 윤리학의 이러한 결함을 보지 못하고, 현대적인 관점에 서서, 이 윤리학을 억지로 고치려고 한다면 플라톤의 사고를 돋보이게 하는 문제의 배경 전체가 사라지고 말 것이다.
'MEDICAL SCIENCE' 카테고리의 다른 글
Benedict Spinoza, Ethics 中 (0) | 2016.04.27 |
---|---|
요한네스 힐쉬베르거, <서양철학사> 上 메모 - 앗티카의 철학 (2) (2) | 2015.05.27 |
요한네스 힐쉬베르거, <서양철학사> 上 메모 - 기계론자들과 아낙사고라스 (0) | 2015.05.20 |
요한네스 힐쉬베르거, <서양철학사> 上 메모 - 헤라클레이토스와 엘레아학파 (0) | 2015.05.20 |
요한네스 힐쉬베르거, <서양철학사> 上 메모 - 밀레토스 학파와 피타고라스 학파 (0) | 2015.05.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