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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활자

죽음

  개가 죽으려 한다. 중학교 때 데려왔으니 10년도 더 되었다. 사람으로 치면 환갑은 진작 넘겼고 내일 당장 어떻게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다. 이름은 꽃님이다. 내 기억은 아빠가 데려온 날부터 꽃님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꽃님이라는 이름이 되었다고 얘기해주고 있지만, 확실치 않다. 꽃님 하면 일반인이 남자 연예인과 데이트 하던 TV프로에 나왔던 바로 그 일반인 꽃님과 분명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구애하고 했을 남자 연예인들의 어렴풋한 얼굴과, 그것을 보고 있던 나와 브라운관 사이의, 90년대 말 2000년대 초반의 공기가 떠오른다. 그것은 꽤나 축축하고 명징한, 내게는 '가정'이라는 이미지와 상통하는 벽지의 백색이다. 사정이 있어 2주 정도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꽃님은 그새 팍삭 늙었다. 부모님 몰래 새벽에 ...소리를 최대한 내지 않고 들어왔다. 꽃님은 원래 내게 큰 관심이 없기 때문에 대낮에, 그것도 집에 사람이 오랫 동안 비어야 나를 반기러 오곤 했으나 내 처량한 신세 때문인지 현관문을 살포시 닫고 거실에 누워 계신 아버지가 깨지 않도록 살금살금 내 방에 들어와 안도의 숨을 내쉰 지 얼마 안 되어 꽃님이 나의 비슷한 발걸음으로 내게 와 손을 핥았다. 나는 호기심이 많고 이미지에 민감한 편이라(게다가 이것은 예상 밖이었다) 꽃님이 걸어오는 폼새만 보고 알 수 없는 처량감에 빠졌다. 나에 대한 것이기도 하고 꽃님에 대한 것이기도 했지만 더러는 이 '시간'에 대한 것이었다. 보대끼다 라는 사투리가 있다. 내가 처음 소주 2병을 마시던 날 그 기의를 파악했던 이 단어, 그 단어를 새벽 4시의 우리집 애완견에게서 느끼고는 지난 동안의 모든 보대낌이 나를 훑고 지나갔다. 내가 집을 나가기 전까지만 해도 그런 기색이 전혀 없었던 꽃님이다. 백내장인지 녹내장인지에 걸려 시력을 점점 잃어 방향을 잃고 헤매는 꼴은 몇 번 봤지만, (나는 그런 개를 예전에 TV에서 보고 거의 울 뻔했었다) 엊그제는 동생이 꽃님이 토했다고 난리였다. 활동도 거의 줄어들었고 밥그릇에 가서도 지난 서러운 식사들을 음미하는 것처럼 미동 없이 서있는 모습도 봤다. 보대낀 것이다. 개 주제에. 왜 그럴까. 왜 노년에 들면 젊은 날의 자신과 용서할 수 없는 욕망과 남이 저지른 죄 등에 대해 초탈하는 것일까. 하루 종일 누워 있거나 보대낀 듯 잠자리를 옮겨 다시 누울 자리를 찾는 꽃님이, 꽃님의 보대낌이 내게 갑자기 많은 것을 시사한다. 어제는 누워 잠을 청하며 우주를 생각했다. 지금 공전하고 있는 지구를. 자전감의 속도를. 그 위에서 보대낄 수밖에 없는 꽃님과 나의 작고 너무나 막막한 숙명을. 너와 나와 그녀의 시간들을. 그리고 거기엔 보대끼다 라는 사투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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