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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활자

관악 시집도서관을 다녀와서.

관악 시집도서관을 다녀와서.


 근대 사회가 부르주아 계급을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산문의 시대가 들이닥쳤다. 시적인 상상력, 시로부터 파생되는 행동 양식들은 비정상적이고 퇴폐적인 것, 소위 비이성적인 것으로 취급되기 시작한 것이다. 부르주아의 부족한 교양을 계몽시키기 위해 전(前) 지배계급이었던 귀족들은 문학, 그중에서도 소설(산문을 기반으로 한)을 그들에게 제시하였으며 곧 소설은 근대문학의 사실상 전부가 되었다. 산문적인 생활양식, 즉 이성적 주체가 중심이 되어 그 내면을 서사의 구조에 충실하게 서술해내는 방법이 시민 사회 전반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일상은 규칙적인 성질을 가진 것으로 재편되었고 광기는 이성이라는 새로운 주인에 의해 추방되었다.

  이 생기 없고 따분한,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만적인 인간관에 반항한 것은 주로 시인들이었다. 부르주아들의 지배 도구는 돈이다. 문학 종사자들은 이전에는 주로 귀족이었거나 귀족인 후원자들에 의해 지원을 받았으므로 생계에 대해 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으나, 점차 돈이 되지 않는 문학 따위에 투자할 생각이 별로 없는 속물적인 부르주아들이 귀족의 위치를 대체하면서 그들은 우선 먹고 사는 문제에 부닥치게 된다. 선택지는 두 가지다. 상업적인 문학을 써내서 부르주아 계급에 편입되거나, 그냥 굶어 죽거나. 이렇게 작가들의 지위가 실추되면서 보들레르와 랭보를 비롯한 근대의 시인들이 대응한 방법은 댄디즘이었다. 유용성 같은 단어와는 상종하지 않을 각오로 독창적인 생활방식만을 고수하며 기괴한 옷을 입고 초연함을 보여주는 것. “끊임없이 취해” 있는 것. “술이건 시건 덕성이건”. (우리나라의 경우도 박인환 시인을 떠올리면 싱크로율이 얼추 맞다. 박인환 曰 “여름은 통속이고 거지야. 겨울이 와야 두툼한 홈스펀 양복도 입고 바바리도 걸치고 머플러도 날리고 모자도 쓸 게 아니냐.” 게다가 그는 폭음하다가 죽었다 심장마비로)

  따라서 시인이, 그리고 시가 갈수록 ‘일반인’들에게 난해해지는 것은 일면 당연한 일이다. 예술이 발전하면 그것이 형식의 문제로 천착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위에서 보았듯이 근대의 예술은 소위 속물적인, 먹고 살기 위해 돈을 버는 것이 당연하게 된 오늘날 이미 ‘일반화’된 노동 개념과 사회 구조, 모든 ‘일상’에 반기를 들면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 상황은 근대화 과정이 상당히 진전된 한국사회에서도 거의 비슷하다 할 수 있겠다. 그러니 후발 근대화 국가인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 ‘시집도서관’이 지어진다는 것은 사실 좀 엽기적일 수도 있는 일이다. 무슨 시인들이 모여서 자비를 털어 만든 것도 아니고 국책으로 그럴듯해 보이기 위해 대충 만들었다는 것이 뻔하긴 하지만 말이다. 나의 경우 처음 이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들었을 때 전시 행정적인, 소위 문화 사업의 일환쯤으로 별 진지한 고민 없이 세워졌으리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시집 조금이라도 읽어야 하지 않겠어? 교양이 있으려면 말이야. 그래서 시집도서관씩이나 지었으니  간지가 나잖아?^^. 그리고 내 예상은 대충 적중했다. 처음 오는 사람들을 위한 추천 시집 목록 같은 게 상세하게 구비된 것도 아니고 대학 교양 강좌 수준의 시 강의 같은 게 열리는 것도 아니다. 한때 문학을 꿈꾸었던, 문학소녀였던 아줌마 할머니들이 와서 요란과 웃음꽃을 활짝 피우는 곳. 개중에는 듣보잡 문예지에 투고하여 등단(?)도 한, 어디 가서 이름 옆에 ‘시인’이 떡하니 박힌 명함을 나눠주며 시인 행세하는 노친네들이 모여 에헴에헴거리며 청운의 못 다한 꿈을 이루는 곳.

  너무 삐딱하게만 보긴 했지만 그래도 말이다. 그래서 어쩔 텐가? 대한민국의 모든 인간이 시인이 될 수도 없고 되기를 바라서도 안 된다. 그래도 이런 데가 없는 것보단 하나쯤은 있는 게 낫겠지. 시집 한 권이라도 더 팔리면 시인들에게는 몇 푼 되지는 않는 돈이더라도 없는 것보단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그리고 말이다. 우연히 관악산에 어린 학생들이 소풍 왔다가 일생일대의 시집을 손에 잡게 되어 인생이 통째로 변할 수도 있는 법 아닌가. 그게 그런, 말하자면 우연 역시 세계를 지배하는 원리 중 하나 아닌가.

  문학은, 예술은 엘리트의 것이어서는 안 되지만 엘리트주의여야만 하는 것은 틀림없다. 개나 소나 예술한다고 설치며, 예술에 무슨 기준이 있냐 권위가 있냐 그래선 안 된다……하는 소리가 통용되는 사회는 지옥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모든 독자들이 엘리트일 필요는 없다. 문학은 내가 아는 한 철학이 초창기에 그랬듯이 철학자의 나라를 건설하려고 시도한 적이 없다. 민중들, 대중들, 속물들이 사는 곳에 시인들도 소설가도 같이 살고 있으므로. 그들의 존재를 욕할 수 있었던 것도 다 그들이 존재해왔기 때문이니까. 산문조의 음계로 작곡된 인생들이 잠깐 와서 시적으로 위로받(고 있다고 믿)는 것도 따지고 보면 죄는 아니지 않는가. 내가 가서 그러지 말라고 할 권리도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술이, 시가 그들만의 리그라고 치부되어서는 안 된다. 또한 고급 독자가 되어야 하는 것은 당위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이것은 윤리적인 문제다(라고 본다). 바라건대 나는 딜레땅뜨라도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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