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학년도 봄 학기
<경제원론>
김석현 교수 지도
『전태일 평전』을 읽고
2009년 가을 즈음 어떤 동아리에서 전태일 평전을 추첨을 통해 나눠준다고 하여 응모를 했었다. 며칠이 지나 전화가 와서 그 동아리 동방에 갔는데, 책을 준다는 것이 실은 신입회원을 모집하기 위한 핑계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소위 NL 계열의 운동권 동아리였는데, 나를 맞이한 것은 졸업한 지 몇 년이 지난 30대 초반의 남자였다.
나는 당시 극악의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었던 터라, 그 선배와 친분을 쌓으면서 밥과 술을 자주 얻어먹었다. 겉으로는 학내-학외 노동자 인권에 대한 대화가 오가면서도, 나는 ‘꿘’ 바닥을 조금 굴렀던 눈치밥으로 그 동아리의 부진한 현황이 눈에 선했고,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든 동방과 동아리의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이 늙은이의 처지가 애처로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째서, 젊은이들이 ‘노동자’를 입에 올리는 것이 터부가 되는가. 나는 그 늙은이를 빼면 아무도 오지 않는 동방에서 전태일 평전을 읽었다. 아주 공공연한 정의(예컨대 ‘자유민주주의')에는 쉽게 찬동하는 대학생들이 어째서 그 정의의 구체적인 실체를 이루는 내용들(예컨대 파업권)에는 경기를 일으키는지, 대학 본부의 강압적인 태도에 쉽게 분개하고 학생들의 복지의 정당성-학생의 주인됨-을 부르짖으면서 어찌하여 총학 선거 후보들이 운동권이라는 이유로 선거에 보이콧을 하는지와 같은 이러한 대립항들. 이들이 과연 모순적인 것인지, 그렇다면 언제부터 모순적인 것이었는지와 같은 나의 현실적인 고민들이 그 책읽기에 얽어들어갔을 것이다.
전태일 열사는 분신했다. 여공들의 처우 및 노동 환경 개선을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다가, 그러니까 설문지를 돌리다가, 근로기준법을 공부하다가, 노조를 결성하려다가, 결국 분신했다.
나는 이런 열사들의 삶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하나씩 알아갈 때마다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다. 어떻게 이런, 자기 보존 욕구에 반한 숭고한 행위가 가능하단 말인가?
법전을 읽을 수 없어서 법대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을 때 느껴지는 순진무구한 막막함, 여공들에게 빵을 먹이기 위해 교통비를 아끼며 출퇴근을 했던 인간애적인 면모, 어째서 이런 인간이 존재해야만 한단 말인가? 이런 열사들은 살아남은 자들에게 윤리적인 동시에 존재론적인 물음을 던진다. ‘어떻게 살 것인가’ 이전에 ‘세계는 악인가’ 하는 물음들.
내가 묘사한 위의 선배는 악한 인간은 아니었지만 열사는 더더욱 아니었다. 여기서 또 큰 문제가 발생한다. 세계를 구성하는 선-악 대립항에 ‘멍청함’까지 끼어든다면?
그가 읽던 책을 흘낏 열어본 뒤 나는 그 선배와 멀어지게 되었다. 그 책은 무언가 고풍스럽고 촌스러운 표지로 제본이 되어 있었고, 그 제목은 ‘옛 사람의 아름다운 사상’이었다. 나는 당시 철학과를 지망하고 있었고, 호기심에 그 책을 펼쳐보게 된 것인데, 경악을 금치 않을 수가 없었다. 다름 아니라 ‘옛 사람’은 김일성이었고, ‘아름다운 사상’은 주체 사상이었던 것이다.
남한에서 진보-보수 문제는 단순한 정치적 스탠스에 대한 선호의 문제가 아니라 생사를 결정하는 이데올로기적 결투의 장이다. ‘전태일’을 누군가가 끌어다 쓸 때, 뿐만 아니라 어떤 사건들이 일련의 주체들에 의해 호명이 될 때 나는 자주 혼란스럽고 아찔해진다. 내가 범하거나 범했을지 모를 오류들, 독단들, 아집들, 아전인수들이 열사들의 이름을 욕되게 할 것만 같아서. 물론 그들의 ‘정신’이 물론 아주 순정한 형태로 어딘가에 고고하게 박제되어있지는 않을 것이다. 현실 정치의 맥락으로 옮겨지는 순간, 사실 명제조차 당위가 된다. 다만 순진한 의도라는 것만으로 용납될 수 없는 참칭들을 늘 경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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