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학년도 1학기
<서양 문학의 이해>
전금주 교수 지도
‘노트르담 드 파리’ 감상문
각색에 대하여
내가 본 뮤지컬은 몇 안 된다. 뮤지컬 작품들에 대해서 잘 모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뮤지컬 장르에 대한 편견이 있어왔기 때문이다.
나는 원래 뮤지컬이나 연극처럼 물질성을 갖는 공연을 관람하는 것보다는 글로 된 작품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원작을 각색하여 상연하는 것은 공간과 시간적인 장벽이 존재하기 때문에 아무리 공을 들인다 해도 감상하는 데 있어서 방해를 받을 수밖에 없다.
글로 된 작품을 읽을 때와 극장에서 연극을 볼 때를 비교해보면, 우선 텍스트는 완성된 형태로 주어져 멈춰 있기 때문에 읽는 사람이 자신의 읽는 행위를 지배할 수 있다. 필요하면 언제고 다시 돌아가서 읽을 수 있고 읽는 속도를 조절할 수도 있는 등 방해받을 만한 요소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반면에 객석에 앉아 배우들의 연기를 볼 경우 작품은 일단 막이 오르면 멈춤이 없이 상연되기 때문에 청중의 눈은 쉴 새 없이 배우들을 따라가야 한다. 연출이나 의상을 비롯한 무대의 전반적인 구성과 배우들의 연기 실력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심미안이 없다면 잠깐 주의를 딴 데 돌리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감상이 이루어지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수업 시간에 ‘노트르담 드 파리’를 볼 때는 이런 걱정들을 전혀 하지 않았을 만큼 집중하고 볼 수가 있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이 DVD판이 뮤지컬보다는 영화에 가까울 정도로 영화적인 문법을 따라 편집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결정적인 것은 이 뮤지컬이 원작의 생생한 감정을 그대로 아니 그것을 뛰어넘어 거의 재창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내가 위에서 한계라고 썼던 ‘물질성’이 여기서는 7000 대 1의 경쟁률을 뚫은 배우들의 절절한 목소리, 구슬프고 때때로 장대한 음악, 소품들(배경에서 춤을 추는 무용수들), 적절한 무대 세트의 이용으로 원작에 갇히지 않고 원작 그 이상의 것을 보여주고 있다.
Déchiré
모든 문학은, 모든 예술은 괴로움에 대한 주석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어떤 형식을 취하고 있건, 길이가 얼마나 되건 할 것 없이 말이다. 괴로움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 작품은 상상하기가 힘들다. 단지 그것이 표면에서 흘러넘쳐 극 전반을 적시느냐, 인물의 내면에서만 끓어 극의 온도를 높이느냐의 차이일 뿐 예술에는 본질적으로 논리로 환원할 수 없는 괴로움-감정이 존재한다.
여기 한 남자가 있다. 겉으로 봤을 때 그는 전혀 괴로울 것이 없는 인물로 보인다. 그는 황제의 군인이며, 결혼을 곧 앞두고 있다. 그의 이름은 다름 아닌 푀부스, 태양의 신 아폴로다. 밝음의 화신, 세계를 빛으로 밝히는 신의 군대가 어째서 déchiré를 외치는가? 어떤 어둠이, 괴로움이 여기 노트르담에 있는가?
L'une pour le jour 한 사람은 낮의 연인
Et l'autre pour la nuit 그리고 한 사람은 밤의 연인
(노래 déchiré 中)
밤과 낮이 구별되어 있다는 것. 에스메랄다와 그의 약혼자가 하나가 아니라는 것. 창녀와 성녀의 간극, 대부분의 남자들의 갈등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그가 “행복에 겨운 남자인 게 내 잘못인가?”라고 외칠 때 어떤 이들은 이것을 단지 철없는 귀족의 배부른 고민으로 치부하려 들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태초에 빛이 있었다. 빛은 저 홀로 완전하지 못하다. 그림자를 없애면서도 늘 그림자를 만드는 것이 빛이다. <노트르담 드 파리>는 ‘푀부스’로 상징되는 빛 안에 이미 드글거리고 있는, 숨겨진 주인공인 ‘욕망’의 향연들이다. 푀부스가 괴로움의 노래를 부를 때 춤을 추는 무용수가 조명이 비춰지는 곳보다 가려지는 곳이 어쩐지 더 역동적으로 보인다. 우리가 볼 수 없는 곳에서 우리를 장악하는 힘. 영영 그림자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빛, 어쩌면 스스로 갇히고 싶었던 빛. 집시 에스메랄다가 당도한 도시의 이름 노트르담notre dame은 바로 ‘우리의 부인-성모 마리아’를 뜻한다. 그녀는 왜 하필 이 거룩한 대성당의 도시에, ‘대성당의 시대’에 오게 된 걸까? 이것은 밤의 충동인가 낮의 충동인가? 밤의 연인과 낮의 연인의 수렴이 이뤄질 것인가?
하지만 푀부스는 이 모두를 불러들여놓고 황급히 떠나버린다. 그녀를 가졌고 생각보다 시시했기 때문에? 아니 그녀를 절대 가질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결국 노트르담은 그녀를 죽이기로 합의한다. 혼자 남은 카지모도는 독자에게 어떤 의무와 동시에 윤리를 부과한다. 어둠과 대면하여 적어도 도망치지 말 것을, 종을 치는 종지기로서 애도라도 보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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