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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

『어린 왕자』를 읽고

2013학년도 1학기

서양 문학의 이해

전금수 교수 지도

『어린 왕자』를 읽고


  <어린 왕자>가 1943년 처음으로 미국에서 출간된 지 어언 70해가 지났다. 여기저기 검색을 해보니 전세계적으로 1억 부 이상 팔렸을 것이며 160여 개의 언어로 번역되었다고 한다. 이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는 화제의 주인공 ‘어린 왕자’는 과연 누구일까? 그리고 이 인기의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어린 왕자>는 이 책을 레옹 베르트라는 어른에게 바쳐서 어린이들에게 미안하다는 한 비행사의 헌사로 시작한다. 레옹 베르트는 생텍쥐페리가 실제로 우정을 나눈 프랑스의 문인이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으며 또한 “추위와 굶주림을 겪으며 프랑스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7p) 여기서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음은 다른 보통 어른들과 반대인, 즉 어린이의 속성으로 제시되고 있다.

  <어린 왕자>에서 세계는 사물을 관찰할 때 외양을 중시하고 객관적인 평가 기준을 추구하는 어른의 세계와 그런 것은 신경 쓰지 않고 그 사물 내면에 존재하는, 쉽게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이해하는 어린이의 세계로 나뉜다. 바로 이 2분법에 ‘어린 왕자’가 어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어른들은 정말 이상하군”이라고 어린 왕자는 여행을 하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59p)

‘어른들은 정말 너무너무 이상하군’ 이라고 여행을 하며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64p)


  어린이의 입장에서 도무지 나이가 든 것들은 죄다(비행사와 레옹 베르트를 제외하고) 머리가 어떻게 되어버린 것 같이 보인다. 그들은 세상에 어떤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지만 스스로 지배하고 있다고 믿는 “왕”이기도 하며(52~59p) 남들이 자기를 숭배해주기를 광적으로 열망하는 “허영꾼”이기도 하다.(60~62p) 동시에 어른은 아무 것도 경험하려 들지 않은 채 거대하고 영속적인 것에만 집착하는 “지리학자”이기도 하며,(76~80p) 어떠한 의문도 가져보지 않고 주어진 명령에만 복종하는 “점등인”이기도 하다.(71~75p)

  어른의 이 수많은 속성에서 한 가지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그들은 그들이 갖고 있는 하나의 신분 혹은 목적에 매몰되어 무엇이 더 중요하고 중요치 않은가 판단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특징을 가장 두드러지게 보여주는 왕을 보자. 왕은 소설 속에서 신을 은유하는 듯한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그는 삼라만상을 다스리지만 그는 “각자가 할 수 있는 것”만을 “명령”한다.(56p) 이는 물리적인 법칙, 즉 우주의 법칙에 어긋나는 일은 세상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는 모든 백성들에게 “복종할 요구할 권리”를 갖는데, 그것은 바로 그의 명령이 합리적이기 때문이다.(56p)

  한편 이 합리의 화신으로 등장하는 왕은 한 가지를 잊고 있는데 그의 합리성, 그의 통치학에는 뚜렷한 목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지배할 뿐이고 명령할 수 있기 때문에 명령할 뿐, 다른 세상에는 어떤 관심조차 없어서 심지어 자신의 왕국조차 순시해본 적이 없다.

  바로 이 무관심과 무목적이 어린이와 대비되는 ‘어른적임’의 가장 중요한 특성이고 따라서 생텍쥐페리는, 아니 사막에 불시착한 한 비행사는 자신의 곁에 있는 어른스러운 왕자 같은 것은 상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어른 왕자라니, 그딴 것은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고 “추위와 굶주림을 겪고 있”는 레옹 베르트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이다.

  <어린 왕자>에서 ‘어림’은 단순히 나이가 적음, 순진무구함을 뜻하는 것만이 아니라 바로 보수적이고 때로는 반동적이며 게으른, 어떤 암적인 사회에 대한 반대적 기치로서의 능동적인 어림이다. ‘어리다’는 단어는 세계에 대한 관심을 표출하는 행위임과 동시에 올바른 목적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그는 사회를 변혁하려는 진지한 혁명가이면서 기존의 어떤 편견에 대해서도 시종일관 모르쇠로 일관하는 천진난만한 시인이기도 하다.

  그가 다른 별에서 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이 어림의 정의와 관계가 깊다. 우선 소설에서 어린 왕자와 비행사가 만나게 되는 장소가 사막이라는 점을 생각해보자. 사막에 불시착한 비행사를 만나는 어린 왕자라는 설정이라면 어린 왕자가 사막 근처에 거주하는 원주민이라거나, 비행사와 마찬가지로 불시착한 불운한 조종사라거나 그도 아니면 하늘에서 떨어진 우주미아라는 세 가지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여기에 가장 그럴 듯한 것, 가장 ‘어린 왕자’에 들어맞는 것은 두말 할 것 없이 마지막의 우주 미아다. 생텍쥐페리는 아마도 위에서 말한 ‘어림’의 속성, 즉 혁명가이자 시인의 모습을 모두 갖춘 어린 왕자의 모습이 조금 더 환상적이길, 그래서 이 어린 왕자가 레옹 베르트를 비롯하여 자신, 그리고 그 당시의 우울한 지식인을 모두 아우르면서 밤하늘에서 영원히 빛나는 별이 되기를 희망한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바로 이 어린 왕자의 ‘어림’과 ‘우주 미아’라는 속성에 비춰 <어린 왕자>의 배경인 사막의 의미를 다시 한번 살펴볼 수 있을 것 같다.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딘가에 우물이 숨어 있어서 그래.” 어린 왕자가 말했다.

나는 갑자기 모래의 그 신비로운 번쩍거림을 이해하게 되었다. 내가 어린애였을 때, 나는 고가에서 살고 있었다. 전설에 의하면 거기에는 보물이 숨겨져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 누구도 그것을 발견해내지 못했다. 어쩌면 찾아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그 집은 매력이 있었다. 내 집은 가슴 깊숙이에 한 비밀을 숨기고 있었다……(113p)


  어린 왕자는 갈증을 없애는 알약을 먹어 절약할 수 있는 53분 동안 천천히 우물가로 걸어가겠다고 말한다.(110p) 이 이야기를 들은 비행사는 물이 다 떨어진 와중에 어린 왕자가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위험인지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깔본다. 그가 만약 계속 어린 왕자를 무시했다면 그 역시 다른 어른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 갈증은 생존을 위해서 반드시 해소되어야만 하는 것이고, 따라서 언제나 갈증에 시달리게 되어 있는 사막은 죽음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거대한 사막에서 무턱대고 우물을 찾는 것”이 “되지도 않는 ”소리“라고 생각하면서도, ”하지만 걷기 시작“한다.(112p) 여기서의 ”하지만“에 바로 사막의 아름다움 내지는 사막의 본질이 있다. 갈증이 무조건 제거되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때, 망망대해와 같은 사막 한 가운데에서 물을 찾기 위해 최초의 발걸음을 내딛을 때 사막은 꼭 생존을 위협하는 공간인 것만은 아니게 된다. 독자는 여기서 사막의 진실함을 목격한다.

  비행사가 사막에 불시착한 것, 이것은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전적으로 진실인 이야기이며 필연인 사건이다. 그는 그가 과거에 잃어버린 자신, 보아뱀에 열광하고 화가를 꿈꾸던 자신을 사막에 와서야 다시 발견한다. 어린 왕자의 말상대가 되어주고 양을 그려준다. 모두 사막 한 가운데에서의 일이다.

  후에 어린 왕자 일행은 우물을 찾는다. 아니, 비행사에게 있어서 우물은 이미 어린 왕자였다. 그것을 깨달은 시점이 우물을 찾은 때였을 뿐이다. 어린 왕자를 만나기 전에 겪은 세계는 그에게 모두 사막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의 역할은 어린 왕자와 그저 말놀이하다가 비행기를 고쳐서 떠나는 것이 아니다. 서로에게 있어서 단 하나뿐인 진실을, 단 하나뿐인 꿈과 어떤 형용사를 붙여도 모자랄 아름다운 우물을 서로만이라도 알아주자는 것이다. 사막에 우물이 숨어있듯이 사막은 우물을 그 안에 감추고 있다. 겉으로는 오직 고통으로만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이는 세계도 실제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나름의 “보물”을 생각하며 살아간다. 꼭 그것을 발견하지 않아도 좋다. 그것의 존재를 믿는 것만으로 고통은 고통 이상의 것이 된다.

  마찬가지로 우물과 관계 맺을 때 갈증은 물로 해소되는 신체적 증상 그 이상의 것이 된다. 갈증은 해소되어야할 것 이전에 긍정되어야 하는 것이고, 갈증을 끝내 극복하지 못하더라도 그것에 시달리면서 목이 쩍쩍 타고 하는 과정 모두가 우물을 찾기 위한 노력으로 고양된다. 어떤 추위나 더위, 두려움을 겪더라도 마찬가지다. 그것들은 세계에 존재하는 다른 ‘우물’들에 의해 긍정되고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어린 왕자>는 어떤 정신이상자가 사막에서 본 신기루에 관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이 사실이냐 거짓이냐 하는 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애초에 “가장 중요한 것”은 “안 보이는 거”였기 때문이다.(114p) 이를 염두에 두어야만 비로소 사막은 아름다워진다.

  여우는 바로 이 우물의 의미를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로 적용시켜 보여준다. 사람은 서로 길들이기 전까지, 상대방의 이름을 알게 되고 밥을 함께 먹고 산책을 같이 다니고 안부 전화를 묻고 등등 일상을 공유하게 되기 전까지 서로에게 있어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우물처럼 일단 그 존재를 확신하게 된다면, 즉 상대방을 내가 인지하고 그를 필요로 하게 된다면 삭막한 세상에서 나는 더 이상 혼자이지 않을 것이다.

  장미를 사랑한 어린 왕자가 자신의 별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여우의 이러한 소중한 가르침을 몰랐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어. (……)너무 어려서 사랑해줄 줄을 몰랐지.”(47p)

“제가 어리석었어요.” 꽃이 마침내 말했다. “용서해줘요, 행복하세요.”

그는 꽃이 나무라지 않는 게 이상했다. 그는 손에 고깔을 든 채 어리둥절해 있었다. 그런 조용한 아늑함을 그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요. 난 당신을 사랑해요.” 꽃이 말했다. (49p)


  물론 장미가 자존심이 너무 세고 새침데기 같이, 어린 왕자에게 함부로 대했던 것이 원인을 제공한 면도 있으나 결국 그녀는 어린 왕자에게 사랑한다고 용기 있는 고백을 한다. 자존심 강한 그녀에게 그것은 붙잡으려는, 떠나지 말라고 울부짖는 시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어린 왕자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리라 생각”하고 떠나버린다. 이 잠깐의 이별 소동은 남자와 여자와의 간극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들의 대화를 보면 서로 좋아하는 것을 알면서도 자존심을 내세우느라 바빠 관계를 그르치고 마는 연애전선을 닮아 있다.

  그렇지만 어린 왕자는 별을 떠나서도 하늘을 바라보며 모든 별이 장미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별로 보일 것이고 장미 또한 어린 왕자가 언제 올 지만을 생각하며 다시 만날 때의 행복을 간절히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길들임이라는 것을, 서로에게 유일무이한 존재가 되어버린다는 것을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여기에 대한 벌일까? 혹은 모든 ‘어린’ 이들의 숙명일까? 어린 왕자는 지구에 온지 1년 만에 뱀에 의해서 죽음을 맞게 된다. 뱀이 소설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여우나 비행사에 비해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지는 않지만,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맹독을 가졌다는 점과 “수수게끼”를 “다 풀” 수 있다는 점에서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숙명을 은유하는 듯하다.(88p)

  어린 왕자의 죽음 내지는 귀환은 비행사가 비행기를 고치는 데 걸린 1주일 뒤에 이뤄지는데, 이렇게 둘 다 동시에 집에 돌아가게 된다는 것으로 봤을 때 어린 왕자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비행사 자신 또는 생텍쥐페리 자신으로 읽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다면 뱀에게 스스로 물린 어린 왕자와, 비행기를 몰다 작전 지역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서 발견된 생텍쥐페리의 의문사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왜 하필 해 지는 것을 “마흔네 번” 봤을까 생각하던 중 나는 생텍쥐페리의 생몰년도가 적힌 책표지를 보게 되었는데, 생텍쥐페리가 죽은 해가 딱 1944년임을 보고 알 수 없는 감정에 빠지게 되었다.

  이 <어린 왕자>라는 작품이 한 편의 유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 사막에 추락해 어린 왕자를 처음 만나게 될 때부터 어린 왕자의 여행 이야기를 듣고, 그의 장미에 관해 듣고 그의 여우를 알게 되고 끝내 왕자와 작별하고 나서 독자들에게 당부하는 부분까지, 그러니까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의 모든 글들이 하나의 덩어리로 묶여 생텍쥐페리의 목소리가 되어 내게 들려오는 듯한 느낌. 나는 지금 본다. 전쟁 중이라서 프랑스로 돌아갈 수 없는 한 명의 군인을, 타국에서 마흔 네 번째 해가 노을져가는 것을 바라보는 생텍쥐페리를. 그리고 저편 우주에서 내게 유리병 편지를 던져 보내고 있는 우주 미아의 이미지를. 그리고 나는 지금 듣는다. 잘 들리지는 않지만 한번 들으면 결코 그 주파수를 잊어버릴 수 없는 매혹적인 목소리를. 다른 수많은 “어린 왕자”들에게 찬사와 연대를 보내며 소설 <어린 왕자>에서처럼 자신의 별로 정말 돌아가게 된 어떤 어린, 영원히 어릴 왕자의 울음을. 그에게 경의를 표하며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의 별이 내 이마 위에 올라와 앉을 것만 같다. 나도 곧 올라가게 될 그 별을 기리며 감상문을 마친다.





인용 페이지는 모두 문학과지성사의 故김현 역 편의『어린 왕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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