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에 간단하게 소주 1병을 먹고 3시쯤 홍도에서 <이터널 선샤인>을 보았다. 아주 맑은 정신에서 보았다는 말씀 되시겠다. 그리고 미리 밝히거니와 나는 <수면의 과학>(2005)을 5번쯤 보았다. <이터널 선샤인>은 맨정신에 본 것이 2회, 술에 만취하여 본 것이 1회쯤이다. 술 먹고 봤을 때의 그 감성을 다시 느끼고 싶어서 본 것인데, 기대에 미치지 못하였다. 아무래도 다음의 유투브 영상 때문에 기대치가 상당히 업되어 있던 것이 큰 탓일 게다.
나의 favorite song 중의 하나인 Spiritualized의 "Ladies and gentlemen we are floating in space"다.
무튼 각설하고, 수면의 과학 역시 <이터널 선샤인>의 변주의 일환으로 볼 수 있는 점을 발견했다. 『이터널 선샤인』은 인위적으로 연인에 대한 기억을 지우는데 반해 <수면의 과학>은 반(半)자의적으로ㅡ즉, 해리성 기억상실증의 형태로ㅡ 기억을 지운다. 전자가 실패한 사랑을 (궁극적으로)복구하기 위한 삭제라면 후자는 예견된 실패를 방지하기 위한 삭제다. 근대적인 코기토의 입장에서 본다면 후자는 아예 퇴보한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영화의 가치가 평가절하되는 것은 아니다. <수면의 과학>을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이건 그냥 찍고 싶은 대로 다 찍은 티가 확 난다. 그 재기발랄한 오프닝 시퀀스 하며, 소재의 다양성을 넘어선 엽기성ㅡ거대거미부터 달리는 포니 인형, 게다가 절대 잊을 수 없는 압권의 1초 타임머신까지(!!!)ㅡ, 현실과 위태롭게 줄타기하는 꿈 시퀀스까지 자신의 이미지를 스크린에 옮기는 능력은 사실 <이터널 선샤인>에서부터 증명된 것이기에 첨언은 하지 않겠다.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두 영화에서 내내 보이는 의식에 대한 미신과 무의식에 대한 광신이 합작하여 만들어내는 어리광이다. 영화적 상상력의 관점으로 본다면 이런 어리광은 분명히 귀중한 어리광이다. 나야 빠의 시선에서 봤기 때문에 거의 울면서 보았고, 그리고 재회하며 엔딩을 맺는 씬 중에서는 역대급으로 인정 받을 것이다(사랑의 성사를 독자에게 맡겨놓을 정도로 무책임한 당돌함을 가진 감독이 요새 몇이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에 언급한 어리광, 감정선에서의 주체의 손쉬운 이탈을 언제까지 곱게 봐줄 것인지는 미지수다. 공드리의 영화는 기상천외한 비의(秘儀)로 가득찬 남의 일기장을 읽는 느낌일 뿐이다. 늦봄 오전에 간 놀이공원에서 뜬금없는 회전목마의 공회전을 마주쳤다고나 할까. 쨌든, 어리광 중에서도 못 이기는 척 하고 져줄 수밖에 없는 어리광도 세상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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