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립키가 제시한 회의적 역설에 대하여
1. 비트겐슈타인의 회의적 역설
§201. 우리의 역설은, 어떤 하나의 규칙이 어떠한 행동 방식도 확정할 수 없으리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각각의 모든 행동 방식이 그 규칙과 일치되게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1
유의미하다고 간주되는 어떤 행동에 대해서 그 행동의 주체와 그것을 관찰하는 관찰자가 있다고 가정하자. 이 행동은 그것이 주체의 의도에 따라 행해진 것일 경우 그리고 동시에 그 행동을 통해 주체의 의도가 관찰자에게 성공적으로 전달되었을 경우에 의해 의미를 획득한(의미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때, 의미는 의사소통을 위한 행위자와 관찰자 간의 최소공약수라고 볼 수 있다.(여기서 관찰자가 꼭 타인일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이 최소공약수에 관한 공리들은 의미의 근거가 될 것이고, 모든 주체들로 하여금 행동을 할 때 이 공리를 갖출 것을 요구하는 것은 언어 전체(발화까지를 행동에 포함시킨다면)의 규칙의 역할이 될 것이다. 바로 이 하나의 규칙이 언어 전체(행동)의 방식을 제약하고 동시에 근거 짓는다. 그리고 이 규칙에서 일탈하는 것들은 올바른 의사소통을 방해하는 것으로서, 언어로 취급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 언어의 의미는 오직 이 규칙들과 이 규칙으로 환원될 수 있는 파생 규칙에 의해서만 확정되고, 이 때 모든 유의미한 행동 방식은 당연히도 그 규칙과 일치할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모든 유의미한 행동 방식이 그 규칙과 일치한다는 사실은 그 규칙이 역설적으로 어떠한 행동 방식도 확정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200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장기 놀이를 하고 있는 사람의 예를 들고 있다. 실제로 어떠한 행동 방식을 하나의 규칙에 의해 설명하는 것은 “비명을 지르고 발을 구르는 것” 2을 장기 놀이의 규칙으로 설명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장기말을 두는 행위뿐만 아니라 보통 장기와는 상관없다고 취급되는 행위들 역시 장기 놀이의 규칙에 일치하도록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즉 어떤 규칙을 갖고서라도 무의미한 행동을 유의미한 행동으로부터 구별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된다. 이렇게 유의미한 모든 행동이 거기에 일치하는 규칙은 결국 어떠한 행동 방식도 확정할 수 없다는 것이 바로 비트겐슈타인의 회의적 역설이다.
한편 우리는, 방금 전과는 반대로 모든 행동 방식이 거기에 일치하는 규칙을 하나 만들 수 있고 동시에 모든 행동 방식이 바로 이 규칙과 모순되도록 만들 수도 있다. 발을 구르는 행위를 장기 놀이의 규칙에 따르도록 만들었듯이, 심지어 장기말을 두는 행위조차 장기 놀이의 규칙에 어긋나게 만드는 일이 가능하다. 어떤 권리로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사실 이것은 규칙을 일종의 해석으로 파악하는 것인데, 비트겐슈타인은 §201에서 이 둘을 엄격히 구분할 것을 요구한다.
……이를 통해 우리가 보이는 것은 요컨대, 어떤 하나의 해석이 아닌, 오히려 우리가 “규칙을 따른다”라고 부르는 것과 “규칙에 반하여 행동한다”라고 부르는 것 속에서 적용의 경우 경우에 따라 표현되는 어떤 규칙 파악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규칙에 따르는 각각의 모든 행동은 하나의 해석이라고 말하는 경향이 존립한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하나의 규칙의 표현을 다른 어떤 하나로 대체하는 것만을 “해석”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3
‘규칙을 따른다’거나 ‘규칙에 반하여 행동한다’라고 우리가 부르는 사례들 속에서 규칙이 파악되기 때문에 실제로 규칙을 따르는 행동들은 각각이 규칙에 대한 하나의 해석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해석 ’은 언제나 규칙이 다른 규칙으로 대체되는 것만을 뜻한다. 이후 비트겐슈타인은 사적 언어 논증의 결론을 진술한다.
§202. 그렇기 때문에, ‘규칙을 따른다’는 것은 하나의 실천이다. 그리고 그 규칙을 따른다고 믿는 것은 규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규칙을 ‘사적으로’ 따를 수 없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다면, 규칙을 따른다고 믿는 것은 규칙을 따르는 것과 동일한 것일 터이기 때문이다. 4
그렇다면 과연 회의적 역설과 규칙을 파악하는 것, 그리고 사적 언어가 불가능하다는 논증은 각각 어떤 관계에 있는가?
2. 크립키-비트겐슈타인의 회의적 역설과 규칙
우리는 항상 어떤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 언어를 사용한다. 그리고 우리는 보통 어떤 표현으로 인해 왜 하필 바로 그 의미가 나타날 수 있는지(다른 의미가 아니라)는 언어의 규칙에 의해 확정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크립키-비트겐슈타인적 회의주의자는 ‘그런 규칙을 어떻게 아는가?’ 하고 묻는다. 누군가 사용한 어떤 언어가 그의 의도에 따라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이라고 생각했을 때, 그 언어가 다음 사용에서도 반드시 그와 같은 의미를 나타내리라는 것을 정당화하는 규칙은 없다는 것이다.
언어는 오로지 유한하게 사용된다. 반면 아직 사용되지 않은, 무한한 의미들은 규칙에 포섭되지 않는다. 유한하게 사용된 용례들의 규칙은 아직 그 모순됨이 밝혀지지 않았을 따름이다. 따라서 처음 의도가 아니라 어떤 의도에 관해서라도 그러한 의도를 확정해주는 규칙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언어의 의미에 관련한 한, 어떠한 규칙도 가설에 불과하다. 규칙과 이미 일치하는 언어가 얼마든지 그 규칙의 반례가 될 수 있다는 것이 크립키-비트겐슈타인의 회의적 역설이다. 앞서 살펴본 비트겐슈타인의 회의적 역설은 규칙이 그것의 개념상 모든 행동 방식들이 거기에 일치하도록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어떤 행동 방식도 확정할 수 없다는 데서 기인한 것이다.
한편 방금 살펴본 크립키-비트겐슈타인의 회의적 역설에 따르면 언어가 가질 수 있는 의미의 풍부함-언어의 애매함이 규칙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아무리 단순한 의미도 무한히 많은 다른 규칙에 의해 포섭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의 상황은 언어를 가지고 무엇인가를 의미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
“어떤 단어에 의해서 무엇을 의미한다는 것은 전혀 있을 수 없다. 우리가 단어를 새로운 경우마다 적용할 때 그것은 매번 무모한 짓이나 마찬가지다. 현재 갖고 있는 의도가 무엇이건 그것은 우리가 하려고 선택할 수 있는 어떤 것과도 일치하도록 해석될 수 있다. 따라서 일치도 충돌도 있을 수 없다.” 5
이 “일치도 충돌도 있을 수 없”는 상태를 직접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은 크립키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단어가 무엇인가를 의미하기 위해 필요한 규칙은 발명될 수 없다. 위에서 서술하였듯이 모든 규칙은 아직 주어지지 않은 언어의 열린(무한한) 의미에 대해서 닫혀있기(유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귀납적인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고 인식론적인 차원만의 문제도 아니다. 의미를 알 수 없다 정도가 아니라 도대체가 어떤 언어를 가지고 무엇인가를 제대로 의미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문제인 것이다. 의미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한 크립키는 이러한 언어의 근원적인 불가능을 극복하기 위해 이제 그 질문을 우회하려고 시도한다. 그리고 크립키가 돌아가는 와중에서 얻은 해결책은 일종의 ‘회의적 해결책’으로서 언어공동체를 발견해내는 것이다. 사적 언어 논증은 바로 이 언어공동체를 목전에 두고 다다른 크립키의 희망봉이라 할 수 있다.
3. 사적 언어 논증과 회의적 해결책
어떤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자신이 이러이러한 의미를 의도했다고 주장할 수 있기 위해서 그 주장에 대응하는 사실 또는 진리 조건이야말로 본질적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런 것은 없기 때문에 그 사람의 모든 주장은 무의미하다는 회의적 결론이 도출되었다. 누군가 어떤 표현을 통해서 스스로 자신 있게 의도했다고 주장할 수 있는 그 표현의 의미는 어떤 규칙에 의해서도 정당화되지 않는다. 그 의미가 특정한 의미를 가리킨다는 것을 판단할 수 있는 진리 조건도 없다. 그러므로 이제 순수한 ‘의미’에 관한 문제는 거론될 수 없다. 그렇다면 이것이 과연 언어의 불가능을 야기하는가?
그의 어떤 의도가 규칙을 따르고 있다는 것을 확정해주는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언뜻 언어가 순전히 사적일 수밖에 없음을 시사하는 듯하다. 이제 언어의 의미는 오직 발화자에게만 귀속되는 것처럼 보인다.
“회의적 논증의 중심 생각은 그가 자신의 의도와 일치하는지 안 하는지를 판단하는 데 이용할 수 있는 사실이란 전혀 없다는 것이다. 만일 한 사람이 고립되어 있다고 가정한다면, 우리가 그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이란 우리의 일상적인 실행이 그에게 규칙이 나타나는 방식으로 그것을 적용하도록 인가해 준다는 게 전부이다.” 6
이 심각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크립키는 사적 언어마저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비트겐슈타인의 사적 언어 논증을 열쇠로 사용한다. 회의적 논증의 중심 생각과 달리 자신이 하나의 규칙을 올바르게 따르고 있다고 믿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그 자신은 이 규칙을 정신의 혼미함 등을 이유로 어겼거나 어길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어쨌거나(자신이 어길지라도) 그는 자신의 규칙이 스스로의 의도에 의해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라고 믿는다. 처음 크립키-비트겐슈타인의 회의적 역설은 앞서 말했듯이 언어의 애매함에서 비롯된 것인데 이는 무한한 언어들이 유한한 의미(혹은 의도)에 귀속될 수 없다는 성질을 뜻한다. 7 그러므로 앞에서의 고립된 그가 과거에 어떤 표현으로써 나타내려고 했던 명석한 의미나 또는 그 의미에 대한 의지로서의 그의 의도를 포함한 어떤 것도 미래의 그 표현이 가질 의미와 동일할 것이라는 것을 정당화할 수 없다. 모든ㅡ심지어 사적인ㅡ규칙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바로 크립키-비트겐슈타인의 사적 언어 논증이며 이 논증은 이런 회의적 역설에 대한 해결책의 일환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하면 그가 규칙을 따른다고 믿는 것이 규칙을 따르는 것은 아니라는 결론은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다. 규칙을 사적으로 따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규칙을 채택한 그 사람을 인도하는 규칙의 개념은 아무런 실질적인 내용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의 시야는 그런 규칙을 인가하는 언어공동체와 언어공동체의 역할로 향해야 한다. 회의적 역설을 직접적으로 돌파하지 않았기 때문에(돌파할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은 회의적 해결책이 될 것이다.
이제 우리는 다시 구체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의사소통의 사례들, 유한한 언어의 의미들로 돌아온다. 사람들이, 아니 한 사람조차도 같은 규칙을 공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확실하므로 남아있는 사실은 어쨌거나 규칙에 의해 확정된 것은 아니더라도 규칙을 따르는 구체적인 수행들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동시에 이 수행들은 유용하다. 규칙은 이미 행동 방식을 확정할 수는 없을 뿐더러, 그러한 시도조차도 하지 않는다. 언어는 맹목적이게 되고 누군가 규칙을 따른다는 것은 규칙에 그의 모든 의도가 일치한다는 것이 아니라 다만 능숙하게 무엇인가를 실천한다는 것이 된다. 언어가 맹목적이라 함은 그것이 처음의 의도, 혹은 규칙을 완전히 잊은 채 진행된다는 뜻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언어공동체는 규칙의 부재를 대리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초래하면서 그 부재 대신에 유용성이라는 보상을 행동에 수여하면서 동시에 언어를 실천으로 격하시킨다. 더 이상 의사소통은 규칙-의미의 교환이 아니라 유용성-실천들의 총집합, 언어 게임인 것이다.
4. 크립키-비트겐슈타인의 회의적 해결책에 대한 비판
“오히려 그는 그저 우리 각자는 새로운 덧셈 문제들을 자동적으로 (우리의 절차가 적절한 것인지를 공동체와 점검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은 채) 계산한다는 것, 공동체는 비정상적인 계산 방식을 교정할 자격이 있다고 느낀다는 것, 실제로 그와 같은 비정상적인 계산은 드물다는 것 등을 지적할 뿐이다.” 8
크립키는 언어공동체 이론이 “사회 혹은 공동체로 확장된 확장된 성향론의 변종”(180p)이라는 비판에 직면할 수 있다고 밝히고 동시에 비트겐슈타인은 이를 수용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적어도 크립키 자신은 그가 말한 언어공동체 이론은 그러한 비판을 수용해야 하는 것처럼 보인다. 크립키가 절망적인 것으로 묘사하는, 의미와 규칙을 확보하기 위해 “가정되는 원초적 상태”(91p)와 언어공동체 이론은 너무나도 닮아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일상 언어에서 의미와 그의 규칙을 완전히 제거하고 실천과 유용성만을 남기는 것 또한 절망적이다. 이 유용성이 근거하는 것은 오직 이러이러러한 행위가, 예를 들면 사과 다섯 개가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네지는 행위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들이다. 크립키는 바로 이 사실을 흄의 조건적 인과론과 연관시켜 의미 명제에서, 예컨대 ‘존스가 A를 의미한다면 그는 a의 행동을 할 것이다’의 대우 명제와 조건문에 주의를 집중시킴으로써 회의적 역설을 비껴가면서도 (언제나 조건부로 이루어지는) 의사소통을 설명해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위의 인용문에서 보이듯이 도대체 어째서 “실제로 그와 같은 비정상적인 계산은 드물”게 일어나는가? 언어공동체의 존재는 바로 이 사실, 비정상적인 계산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는 명제의 또 다른 진리 조건에 불과하지 않는가?
“공동체와 점검할 필요성을 느끼지”도 않은 채 언어 행위가 이루어진다면, 과연 언어공동체를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 존재하는가도 의문이다. 물론 어떤 아이가 더하기 계산에서 완전히 잘못된 답을 내놓는다면 선생님은 그러한 비정상적인 방식을 교정해줄 것이다. 그러나 그 선생님은 사실 언어공동체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 겹하기의 또 다른 추종자가 아닐까? 이렇게 본다면 언어공동체야말로 역설에 빠진 언어를 구차하게 구원해내기 위해 ‘가정된’ 또 하나의 원초적 상태ㅡ독자적이지도 않은ㅡ이다. 우리는 이 딜레마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ㅡ또한 언어공동체가 멸종하지 않고 아직까지 존속할 수 있는 근거를 찾아내기 위해서라도ㅡ유용성의 차원을 포괄하는 규칙을 반드시 필요로 한다.
§18.……우리의 언어는 하나의 오래된 도시로서 간주될 수 있다. 즉 골목길들과 광장들, 오래된 집들과 새 집들, 그리고 상이한 시기에 증축된 부분들을 가진 집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미로; 그리고 이것을 둘러싼, 곧고 규칙적인 거리들과 획일적인 집들을 가진 다수의 새로운 변두리들. 9
분명히 비트겐슈타인의 언어는 불완전하다. 확정되는 근거가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따라서 우리는 언어를 “하나의 오래된 도시”로 간주해야 한다. 언어를 새로운 도시계획에 의해 재편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된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은 분명 어떤 하나의 규칙에 의해 지금의 도시가 형성되었는지, 그 도시가 바로 지금 도시이게끔 확정해주는 규칙이 있는지는 비트겐슈타인에게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도시는 “하나의 미로”이다. 언어가 태어났을 최초의 미궁으로서의 도시가 절망적인 원초적 상태라고 해도 좋다.
그러나 우리의 눈에 확실한 것은 그뿐만이 아니다. 그 미로를 둘러싸고 “새로운 변두리들”이 발생하고 있다. 이들은 “규칙적인 거리들”과 “획일적인 집들”을 가졌다. 1장에서 밝혔듯이 비트겐슈타인이 생각하는 규칙은 결코 해석이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여기서 우리가 미로에 닿을 수 있었던 것이, 비록 도시 전체를 조망해주는 것은 아니더라도 도시의 변두리에 새롭게 생겨난, 규칙적인 거리들을 통해서였음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언어에서 얼마든지 새롭게 생겨날 수 있는, 해석에 의해 대체될 수 없는 어떤 규칙의 표현들이다.
물론 동시에 역설 또한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될 것이다. 언어라는 도시의 조감도가ㅡ변두리로부터ㅡ그려지자마자 드러나는, 그 도심에서 그 내력을 숨기고 있는 미로, 오래된 집들과 새 집들. 우리가 심지어 그 집들과 면면의 골목들의 설계도를 모두 완성했을 때조차 그 그림에 그려져 있는 것은 어쩌면 비트겐슈타인이 머리말에서 말한, “여행에서 생겨난 다수의 풍경 스케치들”에 불과할지 모른다.
참고문헌 2권.
- L. 비트겐슈타인(1969),『철학적 탐구』, 이영철 譯(서울: 서광사, 1994), 128p. [본문으로]
- L. 비트겐슈타인, op.cit., 127p. [본문으로]
- L. 비트겐슈타인, op.cit., 128p. [본문으로]
- Ibid. [본문으로]
- 솔 A. 크립키(2003),『비트겐슈타인-규칙과 사적 언어』, 남기창 譯(서울: 철학과 현실사, 2008), 97p. [본문으로]
- 솔 A. 크립키, op.cit.,146p. [본문으로]
- 여기서 애매함의 정의를 명확히 내리는 편이 좋겠다. 언어가 애매하다는 것은 한 순간, 예컨대 현재 한 언어의 표현이 가진 의미가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모든 표현(언어)에 대해서 그것이 온전히 한 의미만을 뜻했다고 하더라도 그 의미가 앞으로도 지속되리라는 것을 어느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의미는 늘 애매해 왔던 것이 아니라 미래적 입장에서 늘 애매하게 주어질 수밖에 없다. [본문으로]
- 솔 A. 크립키, op.cit., 180p. [본문으로]
- L. 비트겐슈타인, op.cit., 27p.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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