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수첩」을 읽고
ㅡ황홀했던 간밤이여 그리고 백기……………
죄는 성聖의 반의어로서 정립이 가능하다. 세속의 세계, 김승옥의 소설 세계에서는 뭐니뭐니해도 생활 그 자체가 밀림의 왕이다. 생활은 말 그대로 모든 것을 잠식한다. 서커스 삼십 년 경력의 이씨나 연두색의 달인으로서의 아버지는 그런 생활에 의해 잠식된 인물을 대표한다. 감색 교복 마찬가지다. 문제는 그 생활이 소설의 결말이 암시하듯이 지옥이거나, 적어도 무목적으로 가득찬 미스테리한 공간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서울-고향 구도는 사실상 거의 의미가 없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하향은 오히려 진실한 의미에서의 상경이다. 그가 순천에서 여수로, 여수에서 거문도로 점점 더 내려갈수록 이 생활이라고 하는 레토릭이 적용되는 범위는 늘어난다. 깡패들이 진영을 윤간하는 것, 이것은 생활인의 세계에서는 죄가 아니다. 죄의 기준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죄의 기준을 씌울 수 있는 성인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암묵적으로 지옥에 살아가길 택하고 천국에 대해 묻지 않기로 하는 것. 전도된 계몽주의가 성취해낸 아름다운 결과를 김승옥은 거의 날조해내다시피 재구성하고 있다. 그러니 살아낼 재간이 있는가? 많은 함의를 담는 이 물음은 따라서 애초에 물음으로 성립할 조건을 갖추지 못한다. 이상-이성적인 생활인이 된다는 것은 자살한다는 것이다. 아주 생활인이 되어버릴 수는 없다. 생활에 가까운 삶뿐이다. 형기의 죽음이 이를 반증한다면 윤수의 죽음은 이를 필증한다. 형기는 김승옥 소설 전반에서 드러나는 이상적 여인상의 표본이라고 볼 수 있다.(여기서 그의 별칭은 다름아닌 "각시"이다.) 그가 불구가 된 것은, 이렇게 말하면 비약이겠지만 어쩌면 '나'의 바람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그, 혹은 그녀는 이 무시무시한 생활의 세계에서 자아가 끝까지 순수를 갖추기를 원하는 이상형이자 동시에 희생양이다. 그러므로 그의 죽음은 서커스 이씨의 죽음과 다른 의미로 읽힐 수 있다. 그가 맹인이라는 것, 생활을 온전히 영위할 수 없다는 것이 어떤 순수를 의미한다면 말이다. 형기-나의 죽음은 바로 이 '어떤' 순수를 사랑한 순교에 가깝다. 반면 윤수의 죽음은 처참하다. 이 세계가 우연에 지배된다는 것, 아니 적어도 인간의 의도에 의해 지배될 수 없다는 지극히 타당한 생활 세계의 법칙이 어느 정도에까지 그 위력을 과시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그의 죽음. 깡패들에 의해 맞아 죽는 윤수의 장면을 목도했을 때 독자는 분노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분노에 동참할 수 없다. 이것이 필연이다. 이런 과도한 성악설에 근거한 그의 소설은 결국 인간의 위상을 살아내려는 자에서 살아지는 자의 위치로 추락시킨다. 살아지다 보면 여러 첫 경험들을 하게 되고 이런 경험들의 종합이 완전한-끔찍한 인간으로서의 노인을 만들어낸다. 이 노인은 생활의 달인이다. 노인이 되지 못한 자는 모두 죽어야 한다. 노인이 성스럽기 때문이 아니라 성스러운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인의 반의어는 어린이가 아니다. 노인의 반의어는 청년이며, 이 청년들은 처음부터 자살이라는 피와 재가 묻은 빛깔의 운명을 달고 태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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