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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라필름 HWARAFILM

<지상의 양식> 해설

<지상의 양식>은 내내 '종하'의 시선을 따라갑니다. 극중에서 '종하'는  은행원인지, 아니면 사망신고서를 낸 고객인지 분간이 잘 되지 않습니다. 아니면 아예 다른 제 3의 인물일 지도 모릅니다. 그는 자신의 집이 아닌 곳에서 눈을 떠서, 내내 영광의 거리를 헤매고 다닙니다.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마주치는 인물은 극중의 '광인(狂人)'인데요. 이 인물은 영문을 알 수 없는 사건(남의 집에서 눈을 뜨고, 그 집에 자신의 이름 '김종하'가 명패로 걸려 있는 등)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기이한 세계를 관장합니다. (드뷔시의 음악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의 주인공 "목신"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인물의 행동과 대사는 예측이 불가능합니다. 담배를 입에 물긴 하지만 불을 붙이지 않고, 종하를 바라보는 것처럼 말을 하다가 천연덕스럽게 종하 뒤에 있는 비석을 향해 소리치며 다가갑니다. 마치 '종하'가 저 비석인 것처럼요. 그리고 그는 갑작스레 사라집니다. 종하의 나레이션이 뒤를 잇습니다. "나는 그를 저수지에서 다시 만났다." 관객들은 종하의 걸음걸이를 좇으며 다시 만날 '그'를 기대하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수지에서 발걸음을 멈춘 종하는 난데없이 태양을 보고 쓰러져버립니다.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에서는 태양 때문에 사람을 죽였다고 말하는 '뫼르소'가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태양 때문에 과연 사람을 죽이고 살릴 수 있을까요? 영화는 물론 이 질문에 대답을 하지는 않습니다. 종하는 처음 오프닝에서 생전부지의 시골집에서 눈을 떴습니다. 이번에 쓰러진 뒤에도 그는 그 집에서 일어납니다. 하지만 이제 그는 뭔가 깨달은 것 같이, 자신에게 주어진 '지도'를 들고 무덤(墓)이라고 써진 곳을 찾아갑니다. 놀랍게도 제사상에 붙은 사진은 자신입니다. 종하는 오늘 하루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을 긍정하는 듯이 무덤덤하게 상에 놓인 양주를 들어 마십니다.


저는 매일매일 자고 일어나면서 어제의 '나'가 오늘의 '나'와 다른 것이 아닐까. 지금 내가 '나'라고 믿고 있는 정체성은 매우 우연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자주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여기 있는 내 자신이 무의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 우연성을 긍정하고, 내 앞에 놓인 지도를 따라가듯, 내 무덤에 놓인 양주를 들어마시듯, 삶을 사랑하자는 것이 마지막 장면의 연출의도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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