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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활자

고재종ㅡ생태에서 인생태로

지옥에서 보낸 한철을 노래한 시인은

불행은 나의 신이었다고 적었네.

오늘 나는 목백일홍 꽃그늘에서

석 달 열흘은 사랑하리라고 적어도

나의 큰 죄과는 어쩔 수 없네, 늘 삶의 바깥에

숨은 음모가 있는 거라고 핑계댔으니

불행은 내가 창조한 신이어서,

저 황홀한 아편 송이송이 같은 색(色)들

아편 맛 같은 색정(色情)에 저항하지 못하는

삼복염천의 호사를 어찌하랴.

회의하다니 몽상하다니, 고통은 여기 있고

우울이라니 동경이라니, 죽음은 내가 원했다.

새 애인을 만나 전 남자의 아이를 지우러 가는

여자가 걷는 길처럼

내가 걷는 길은 언제나 나의 형벌이었으니

삼복염천 개는 제발 목 달지 말고, 피비린내는

참수의 무리가 닥치기 전에

온통 색뿐이어서 색정뿐이어서

천지가 따로 없는 저 황홀로 터지며

석 달 열흘은 사랑하리라 해도, 복날

개처럼 늘어진 환멸 때문에

마냥 긁어대는 상처에서 끊임없이 피가 나는

내 비명의, 송이송이의, 목백일홍만을 보네.

 

고재종 / '목백일홍 꽃그늘에서 보낸 한철' 전문

 

 

  고재종의 시를 읽을 때마다 드는 기분은, 사랑, 하고 싶다. 전남 장성 출신으로 농사꾼의 심성, 문명-반문명의 도식에서 전개된 그의 생태 시 세계는 '쪽빛 문장'을 기점으로 실존적인 물음으로 바뀌었다. '지하생활자'나 '독학자'처럼 전장을 알 수는 없지만 어쨌거나 패배한 것이 분명한 남성 주체인 화자가 그럼에도 살아야겠다는, 끊임없이 마주치는 '환멸'과 '회의'와 '우울'과 인간을 덥치는 '고통'과 '죽음'을 '내가 원했'다는 언술로써 무효화해버리는, 그럼에도 살아야겠다는 이 길고 긴 전통적 명제(!)를 그만의 어법으로 변주해낸다. 인생은 늘 '형벌'이고 어쩔 수 없는 '죄과'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그것이 외부에서 인간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내부에서 창조해낸 것, 문명-반문명 혹은 인간-반인간의 도식을 무효화함으로써 인간이 스스로를 억압하는 인간 외부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동시에 그것 역시 '내가 창조한 신'이기 때문에 "삼복염천의 호사를 어찌하랴". 사랑, 하고 싶다. 사랑, 해야만 한다. 의사소통적, 이성적이자 이상적인 인간형과 같은 항은 그의 시에서 언제나 미지항이며 나아가 불가능한, 허근이다. 그러나 실천적인 의지, 실패할 밖이라는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그 실패로에 대한 무한한 자기투쟁의 숭고함이 그의 세계를 풍부하게 만든다. 별이 없는 '통증', '한 점이라도 서로 나눌 수 없는 슬픔', '아픔'. 인간에게, 오직 인간만에게 별이 있다는 것은 돌아봄직에 얼마나 오만한가. 역사적으로 사랑은 단 한 번이라도 이상적인 해결책이었던 적이 없다. 그러나, 이 숙명 앞에서 어쩔텐가? '마냥 긁어대는 상처'에서는 목백일홍이 피를 쏟아내는데, 저 스스로 황홀로 터지는데, 그것이 자연일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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