畵羅cahier du cinema

<미드나잇 인 파리> 우디 앨런 (2011)

화라 2017. 7. 11. 13:12



참을 수 없는 자본의 악취


  피카소의 게르니카, 20세기의 전쟁사, 제국주의, 소비에트 연방에 대한 공포, 이 모든 반-자본주의적인 요소가 거세되어버린 SF 서사 혹은 창세기에 어울릴 법한 빠리. 그렇게 역사는 사상된 채 보여지는 것은 패키지 여행객의 사진기를 훔친 듯한 풍경들 뿐.

  예술가들은 파티를 일삼으며 잘 차려진 사교장에서 술을 마시고 몇 마디 명언으로 여자를 사로잡는 괴팍한 호색한일 뿐이고, 이것이 헐리우드의 ‘저속한’ 상업예술에 대비되는 <순수> 문학-예술이라고 주장하는 파렴치함. 

밀레니엄 세대에게 20세기가 황금기였다면, 1차 세계대전 전후 세대에게는 벨에포크가 황금기였고, 벨에포크 세대에게는 르네상스가 황금기로 여겨진다. 그러니까 과거를 그리워하지 말고 현재에 만족하자!는 결론이 공허한 이유는 섹시하면서 교양있는-그녀 역시 벨 포터를 숭배한다- 여자가 반드시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드리아나의 시간 역행이 충동으로 폄하되는 것은, 여성에게 자신을 파괴할 만큼의 매력을 남성은 용납하지 않기 때문에, 뜬금없이 그녀의 일기를 노점상에서 발견하여 몇 줄글을 읽고 그녀의 모든 욕망을 깨달은양 그녀를 부릴 수 있다고 믿게 된 일련의 시퀀스는 그 신념이 얼마나 유아적인지를 증거한다.

  아내의 귀걸이를 팔아 여자를 사려고 한 죄는 둘러대면서, 드디어 ‘속물’적인 아내를 차버리고 무슨 깨달음이라도 얻은 양 빠리를 배회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아드리아나와 아내의 절충물인 ‘벨포터녀’가 기다리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빠리 여행은 결국 ‘속물’에 대해 도덕적으로 우위에 서면서 ‘속물’을 내치는 계기였을 뿐, 왜냐하면 아드리아나 같은 여자-충동이 없이는 ‘속물’과 대면할 용기가 없기 때문에. ‘벨포터녀’와 동행할 다음 행선지가 ‘빠리’는 아닐지라도, ‘미드나잇’은 되풀이되고 자본-남성은 불꺼질 줄을 모를 것이다.